"정복자들이 중남미를 그토록 단호하게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총과 쇠로 설명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균, 균, 균이다."
영국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조너선 케네디 런던퀸메리대 교수는 신간 '균은 어떻게 세상을 만들어 가는가'(아카넷)에서 인류 문명의 흥망성쇠를 이끈 진정한 주역은 '균'이었다고 단언합니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호모사피엔스가 어떤 이유로 다른 인류 종을 밀어내고 지구를 지배하게 됐는지부터 설명합니다. 그는 호모사피엔스의 승리가 단순히 더 뛰어난 지능이나 우월한 문화 때문이 아니라, 아프리카에서의 오랜 진화 과정에서 얻은 강력한 면역 체계 덕분이라고 주장합니다. 반면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 같은 다른 인류 종은 호모사피엔스가 옮긴 병원균에 취약해 결국 멸종의 길을 걸었다고 말합니다.
호모사피엔스의 승리는 수만 년 뒤 아메리카 대륙에서 그대로 재현됩니다. 1492년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에 도착하면서 유럽의 병원균이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했고, 이는 아즈텍과 잉카제국의 몰락을 불러왔습니다. 스페인 정복자들의 총이나 말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었던 것은 천연두와 홍역 같은 질병이었습니다. 500명 남짓한 병력을 이끌었던 코르테스가 멕시코에서 아즈텍 인구의 80%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바로 전염병의 힘이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사례를 토대로 균이 문명의 붕괴와 새로운 세계 질서의 탄생을 주도했다고 주장합니다.
저자는 균이 노예제 확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가설도 내세웁니다. 서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이 카리브해와 아메리카 대륙으로 대거 끌려간 배경에는 황열병과 말라리아 같은 열대성 질병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럽인들은 이들 질병에 취약했지만, 아프리카인들은 오랜 기간 형성된 면역 덕분에 살아남을 확률이 높았습니다.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질병에 강하다는 이유로 아프리카인들은 노예로서의 상품성이 높아졌고, 이는 노예제가 확산하는 계기가 됐다고 저자는 설명합니다.
책은 단순한 전염병의 역사를 기술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균이 인간 사회의 구조를 어떻게 재편했는지, 어떻게 국가와 제국의 흥망을 가르고 경제와 노동 체계까지 변화시켰는지를 통합적으로 설명합니다. 유전학, 인류학, 고고학, 경제학, 생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최신 연구 성과를 녹여내 방대한 역사적 스펙트럼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냅니다.
저자는 책 말미에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있다는 오만한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인간은 미시적인 세계에 초대받은 손님일 뿐"이라며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에 일침을 가합니다. 인류를 둘러싼 무수한 균들은 단순히 질병을 퍼뜨리는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기초를 이루며 생태계의 다양성과 역동성에 깊이 관여해왔다고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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