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님의 펜을 구매할 수 있나요?"
"따로 주문 제작된 제품이며 판매가 어렵고 계획도 없는 상태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지난 27일 국내 수제 만년필 제작업체 '제나일'이 홈페이지에 띄운 팝업 안내문에 문답으로 공지된 내용입니다.
25일(현지시간)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서명용 펜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좋은 펜"(nice pen)이라며 뜻밖에 관심을 보인 후 올라온 공지입니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국산 서명 펜이 깜짝 스타가 된 것을 계기로 역사적·문화적으로 중요하게 등장한 펜을 돌아봤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찜'한 이 대통령의 서명용 펜은 이번 정상회담을 위해 제작된 세상에 하나뿐인 펜입니다.
갈색빛을 띠는 다소 두꺼운 형태로, 대통령실 요청을 받아 약 두 달에 걸쳐 국내 수제 만년필 공방 '제나일'의 장인이 제작했습니다.
제나일은 영등포구 문래동에 위치한 소규모 공방으로, 모든 제품을 수작업으로만 생산합니다.
제나일 홈페이지에 따르면, 한 제품은 한 명의 장인이 나무 선별부터 마감까지 생산의 전 과정을 책임지며 화학 마감제 대신 셀락, 카아누바 등 자연 마감제를 사용합니다. 가격은 8만~18만 원대입니다.
제나일은 정상회담 직후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자 홈페이지에 "저희가 소규모 공방인지라 많아도 하루에 열 몇개 정도만 제작이 가능한 규모인데 짧은 순간에 너무 많은 주문이 들어와 주문을 닫아 놓게 됐다"고 공지를 띄웠습니다.
폭주하는 주문이 제작 역량을 초과해 진땀을 흘리는 모양새입니다.
제나일은 "주문이 가능한 상태는 따로 예측이 어려울 것 같다"며 "주문이 가능할 때 솔드아웃을 풀어놓는 정도로 진행 가능할 것 같다"고 알렸습니다.
제나일은 방문 취재 요청에도 "주문이 너무 밀려 대응할 수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이 대통령 서명 펜의 펜심도 화제를 모았습니다. 국내 대표 문구 제조업체인 모나미의 네임펜 심을 서명하기 편하게 다듬어 사용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모나미 주가는 상한가를 기록했습니다. 지난 26일 모나미 주가는 전장보다 29.92% 오른 2천575원에 거래를 마감했습니다.
앞서도 국산 펜이 중요한 역사적 현장에서 주목받은 적이 있습니다.
2001년 전철환 당시 한국은행 총재는 국제통화기금(IMF) 차입금 최종 상환 결재 서류에 국산 아피스 볼펜을 사용했습니다.
해당 볼펜은 2002년 사료로 지정돼 현재 한국은행 사료실에 보관돼 있습니다.
당시 일부 보도에 따르면 전 전 총재는 IMF 차입금 상환 결재라는 중요한 순간 국산 펜 사용을 고집했다고 합니다.
1956년 부산에서 설립된 아피스는 광복 이후 한국 최초의 만년필 회사입니다.
회사 정식 명칭은 '국제아피스공업사'. 그러나 2010년대 중반 생산을 멈추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드라마나 영화, 소설 등 문화 작품 속에서도 펜은 종종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미국에서 리메이크된 첫 한국 드라마인 KBS 2TV '굿닥터'(2013년) 첫회에는 서번트 증후군을 진단 받은 천재 외과의 시온(주원 분)이 기차 대합실에서 볼펜을 이용해 기흉 환자를 응급 처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사용된 볼펜이 이른바 '국민 볼펜'인 모나미153입니다. 주변 어디서나 흔하게 구할 수 있는 볼펜을 사용해 응급 처치를 한다는 설정에 따라 모나미153이 등장했습니다.
반대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는 고문 장면에 같은 모나미 볼펜이 등장합니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의 4장 '쇠와 피'는 "평범한 볼펜이다. 모나미 검정 볼펜. 그걸 손가락 사이에 교차시켜 끼우게 했다"로 시작합니다.
1963년 5월 출시된 모나미153은 우리나라 최초의 볼펜입니다. 153펜의 앞자리 '15'는 15원이라는 의미고, 뒷자리 '3'은 모나미가 만든 세 번째 제품이라는 뜻입니다.
모나미 창업자 송삼석 회장이 1962년 국제산업박람회에 참석했다가 일본 최대 문구업체인 '우치다 요코'의 직원이 사용하는 펜을 보고 영감을 얻은 게 153펜의 탄생 배경입니다.
녹음 기능이 있는 보이스펜은 범죄 에피소드의 단골입니다.
지난 해 방송된 SBS TV 드라마 '굿파트너'(2024)에서 변호사 차은경(장나라)은 가정폭력 증거가 녹음된 보이스펜으로 재판에서 이깁니다.
또 tvN 드라마 '눈물의 여왕'(2024)에서는 재벌 회장 홍만대(김갑수)가 죽기 전 보이스펜에 녹음해놓은 유언이 가족의 재산 싸움에서 판을 뒤집는 역할을 하고, SBS TV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2013)에서는 이재경(신성록)이 살인을 저지른 정황이 보이스펜에 녹음됩니다.
영화 '탈주'(2024)에서는 북한 탈출을 계획한 북한군 중사 규남(이제훈)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금장 만년필이 그의 발목을 잡기도 하고 위기를 모면하게도 하는 중요한 소품으로 계속 등장합니다.
그런가 하면 KBS 2TV '태양의 후예'(2016)에서는 북한군 특수요원 안정준(지승현)의 소지품에서 독이 발라진 볼펜이 살상 무기로 등장했고, SBS TV '신사의 품격'(2012)에서는 단기 기억 상실증이 있는 건축가 김도진(장동건)이 48시간까지 녹음이 가능한 보이스펜을 늘 소지하고 다닙니다.
이밖에 영화 '뷰티풀 마인드'(2001)에서는 훌륭한 업적을 세운 교수에게 동료 교수들이 존경의 의미를 담아 만년필을 헌정하는 장면이 나오고, 아이작 디네센의 동명 자전적 소설을 영화로 옮긴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6)에서는 데니스(로버트 레드포드)가 카렌(메릴 스트리프)에게 만년필을 선물하며 글을 쓰라고 권유합니다.
한편 소설가들의 만년필 사랑도 각별합니다.
미국 베스트셀러 작가 폴 오스터(1947~2024)는 글을 쓸 때 컴퓨터 대신 만년필과 오래된 타자기를 사용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해마다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로 거론되는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2020년 라디오방송에서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만년필과 잉크를 사용해 글을 쓰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하루키는 앞서 1980년대 후반까지도 만년필로 원고지에 직접 썼는데, 과거 자신이 만년필로 썼던 원고들이 고서점이나 인터넷 등에서 고가에 거래되고 있는 사실을 확인하고 격분하기도 했습니다.
소설가 김홍신 역시 여전히 만년필을 사용해 소설을 쓰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TJB 대전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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